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(문단 편집) == 내용 ==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 있어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바로 '''Cuius regio, eius religio'''이다. 직역하자면 '그의 왕국에, 그의 종교를'이라는 뜻의 이 라틴어 경구는 신성 로마 제국 내 제후들에게 가톨릭과 루터교 가운데 종교를 선택할 자유를 부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.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모든 개인에게 [[종교의 자유|신앙의 자유]]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. 즉 해당 지역의 제후가 가톨릭과 루터파 신앙 중 하나를 선택했다면 신민들은 이를 군말없이 따라야만 했다.[* 제후의 종교가 부족의 종교를 결정하는 것은 [[고대]]에서 [[중세]]로 넘어갈 무렵 [[기독교]]로 개종하던 [[게르만]] 족장 시대부터의 전통이었다. 제후의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주할 권리가 인정되었으며, 이주 과정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재산을 처분할 권리 또한 인정되었다.] 덧붙여서 [[브레멘]], 도나우뵈르트를 비롯한 다수 제국자유도시에서는 가톨릭과 루터교의 공존이 인정되었다.[* 당시, 이미 감정의 골이 깊은 두 종교가 한 도시에 공존한다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있었는데, 이러한 우려는 1606년에 벌어진 [[30년 전쟁#s-2|도나우뵈르트 사건]]이 발발함으로써 옳은 것으로 드러난다.] 다만 60여 개 제국 도시 중에 50여 개는 완전히 개신교로 기울고 [[레겐스부르크]]를 포함한 2개 도시만이 가톨릭 우세로 남았기에 가톨릭에 유리한 합의였다. 또 Corpus catholicorum 과 corpus evangelicorum의 생성으로 종교법이 분립되면서 가톨릭 교황청은 교리 입법권자로써 위상과 권력이 크게 약해졌다. 이에 반해, 자유도시와 국가의 권력은 상승하였으며, 제국 전체 인구의 90%가 개신교로 개종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.[* 가톨릭 인구가 1/3까지 회복한건 강제력과 신교도 지역에 가톨릭 제후 복귀로 인한 30년 전쟁 이후이다.] 마지막 조항은 카를 5세의 퇴위를 약정한다. 자신의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는 카를 5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[* 신성 로마 제국은 선출제라는 것을 기억하자. 황제는 3명의 성속제후인 [[마인츠 선제후국|마인츠]]·[[트리어 선제후국|트리어]]·[[쾰른 선제후국|쾰른]] 대주교와 4명의 세속제후인 [[작센 선제후국|작센]]·[[팔츠 선제후국|팔츠]]·[[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|브란덴부르크]] 선제후 및 [[보헤미아 왕국|보헤미아 왕]]의 투표로 선출되었다. 심지어 보헤미아 왕은 페르디난트 1세였다.], 제위는 결국 1556년에 페르디난트 1세에게로 돌아갔다. 문제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받은 것은 루터파 뿐이었으며, 이 당시 한창 유럽에서 세를 확장해나가고 있던 [[칼뱅파]]는 여전히 그 존재를 부인당했다. 결국 칼뱅파에 대한 어정쩡한 처리가 빌미가 되어 1618년 [[30년 전쟁]]이 발발했고, 16~17세기 유럽을 점철한 피비린내 나는 종교 갈등은 [[베스트팔렌 조약]]을 통해서 비로소 끝났다.[* 사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도 온전한 끝은 아니었다. 특히 [[프랑스 국왕]] [[루이 14세]]는 할아버지 [[앙리 4세]]의 [[낭트 칙령]]을 철폐하고 [[위그노]]들에게 무지막지한 탄압을 가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